차두리 선수가 은퇴했다. "대한민국에서 차범근의 아들로 태어나 축구선수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매우 버거운 일"이라는 솔직한 고백이 인상적이었던 선수다. 그래서 축구 얘기 좀 해자.
동네마다 조기축구회 하나쯤은 있다. 축구회 모임에 처음으로 얼굴 내민 사람들에게 기존 축구회 멤버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축구 잘 해요” 일거다. “어느 포지션이든 맡겨만 주신다면 열심히 잘 할 자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축구천재 혹은 축구몸치다. 그런데 축구천재일 확률은 매우 낮다. 만약 천재라면 프로구단에서 이미 선수로 뛰고 있어서 동네 축구따위나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축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저는 공격수 혹은 수비수” 더 나아가 정확한 포지션, 그리고 자신이 구사하는 기술, 약점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얘기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느 포지션이든 맡겨만 주신다면...” 으로 시작하는 이 답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그렇지. 면접자리에서다. 대학에 들어오기 위한 수시면접, 직장을 얻기 위한 취업면접에서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면접만큼 떨리는 자리도 없을 것이다. 수시면접이든, 직장면접이든, 면접은 마음 편한 자리가 아니다. 편하기는 커녕 손이 떨리고, 땀도 나고, 숨도 가빠진다. 그러다보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뭐라도 한마디 더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그만 툭하고 달달 외운 영어숙어처럼 나와 버리는 말들이 있다. 정확한 통계를 알기도 어렵겠지만, 피면접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뭐든 맡겨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력한 의지와 성실성,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추진력과 집념을 완급을 조절하며 여백의 미를 살려 표현한 나폴레옹급 어구로 많이 애용되고 있다.
“열심히 잘 할 자신 있습니다.” 극강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단골 문장이다. 대답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잘 하는 데다가 열심히 까지 한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저를 뽑아주신다면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뽑지 않고 누굴 뽑는다는 말인가? 뽑기만 하면 실망따위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최고급 인재라는 것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는 문장이다.
“저를 뽑지 않으신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뽑아 달라는 단계를 넘어서, 뽑지 않았을 때의 문제점에 대한 분석과 결과예견까지 순식간에 끝낸 심상치 않은 통찰력의 소유자임을 겸손하게 드러낼 때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약간 협박에 가깝긴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이 정도로 톤을 조절해서 한거면 인간 됨됨이도 믿을 만 할 거다.
여기까지는 피면접자 입장에서 해석한 내용이다. 그러면 면접관의 언어로 번역을 해보자.
“뭐든 맡겨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 면접관 언어로 번역 --> “제가 무엇을 잘 할 수 있을지 제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시간 여유되시면 여러 가지 일들로 저를 테스트해서 제가 잘 하는 것을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되면 말구요. 그런데 제가 지금 너무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뭐든 주절거려야 되서..주절 주절,, 열심,, 열심,, 성실,,, 성실,,”
“열심히 잘 할 자신 있습니다.” --> 면접관 언어로 번역 --> “준비해 온 건 없구요, 그나마 평소에 책도 잘 안 읽고 남들과 대화도 잘 안해 봐서 길게 말하는 건 더더욱 자신이 없네요. 말 더듬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저는 면접참가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저를 뽑아주신다면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면접관 언어로 번역 --> “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는 지구의 자전축이자 내핵입니다. 근데 여기 뭐하는 자리인가요?”
“저를 뽑지 않으신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 면접관 언어로 번역 --> “저는 깡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최선의 대답은 너무 어렵고,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요령만 간단히 말하자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뭐든 잘 할 수 있으니...” 대신에 “저는 A와 B는 잘 하고, C와 D는 관심있어 노력 중이고, E와 F는 해 보지 않았으나, G와 H를 해 본 경험과 흥미를 생각하면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다”라고 구체적으로 얘기해야 한다.
“저를 뽑아주신다면 실망시켜드리지...” 라는 말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저를 뽑고나서 만족스러워 하실 점은 업무면에서는 A이고, 팀웤면에서는 B이고,,, 등과 같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철저히 분석해서 준비한 사람이고, 이 자리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 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제발 “뽑아만 주신다면,,,”으로 시작하는 구걸형 비참고백으로 면접을 마무리하는 실수는 범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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